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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참요(讖謠) 파랑새 동학의 노래라 불리는 '파랑새요' 같은 조 같은 가락 달라진 노랫말 시대적 맥락 속 숨은 뜻 들어 있어 세상 모든 소리 들어 아는 '관음조' 천리 밖 소리 들어 길흉화복 꿰뚫어 봉건사회 뿌리째 뒤흔든 동학운동 다시금 파랑해 노래를 흘얼거린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지었다. 벽화를 그려야 할 차례였다. 마침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리겠다.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수락은 하였지만 보지 말라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림 그린다던 노인은 온데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지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진 무위사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림을 그리던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룡점정(畵龍點睛), 점안식을 못한 셈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무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의 파랑새 설화는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 설화나 낙산사 및 홍련암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한 곳에 참배를 하다가 푸른 새를 만났다. 갑자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그곳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비로소 바다에 붉은 빛의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의 낙산사 혹은 홍련암이 생긴 내력이다. 내소사에는 호랑이가 사찰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丹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남녀노소 모르는 이 없이 잘 알려진 우리 민요다. 대개 '파랑새노래'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기서의 파랑새를 1894년 아산만에 상륙했던 청나라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이니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하다. 녹두밭은 동학당이고 청포장수는 서민대중이며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이 녹두였다니 녹두꽃을 녹두장군에 비유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풀이들은 견강부회적 말맞추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한자말을 우리식으로 풀어쓸 때 이런 잘못을 많이 범한다. 청나라는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썼다.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하더라도 청나라군사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이렇게도 불린다.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의 자리에 '녹두새'가 배치되었다. 이 노래로 보면 녹두새(파랑새)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정 반대의 해석인 셈이다. 같은 곡조 같은 리듬인데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바꿔 불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노래여서일까? 당대 민중들의 수요와 욕망들이 달라서였을까? 그래서다. 동학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파랑새요'를 상고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단순한 댓구로 가져다 쓴 용어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인용하는 배경, 행간의 숨은 뜻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랑새와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 밭에 머물렀던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 밭의 파랑새야......" 필사본에 나오는 '청조가' 즉 파란새 노래다. 가사를 보면 동학의 '파랑새노래'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랑새가 그렇고 콩밭이 그렇다. 여기서의 파랑새는 사다함의 연인 미실이다. 정민 교수는 이 노래가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체의 위작 가능성이 분분하니 크게 강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파랑새노래의 연원은 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설화적 맥락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황해북도 고달굴 전설에 관음조(觀音鳥)가 나온다. 여기서의 관음조가 곧 파랑새다. 낙산사와 홍련암이 우리나라 관음의 최대 도량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얻은 아이가 자장이라는 이야기와 경덕왕 때 천수관음에게 빌어서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6세기 무렵이니 어쩌면 '파랑새 노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설화적 내력으로만 본다면 강진 무위사나 부안 내소사 등도 관음도량이다.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소리 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꿰뚫어본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생겨난 당대 민중들의 조바심이 직조해낸 것이 동학의 파랑새 노래 아닐까? 김익두가 펴낸 〈전북의 민요〉에는 또 다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다. "새야새야 무당새야 미륵산에 앉지 마라 샛바람이 부는 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무위사에서 점안식을 하지 못하고 날아 가버린 파랑새가 저잣거리에 들어 무당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식자들이 지어 좀 어렵긴 하지만 이들 모두를 참요(讖謠)라 한다. 여기서의 무당새, 미륵산, 눈동자는 전봉준, 녹두꽃, 동학으로 소급되며 곤핍한 이승을 구원할 관음으로 환원된다. 좌절된 혁명, 실패한 전쟁이었을까.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던 그 정신이 유효하다면 어쩌면 동학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파랑새 노래를 흥얼거려봐야겠다. 오월의 참요(讖謠)흔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봉건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넘어가는 절절한 전쟁이었다면 5.18 또한 부조리한 군부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치열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 불린 노래들을 에둘러 참요(讖謠)로 해석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주제삼은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노랫말들로 구성된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나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 동학혁명기의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5.18 기간에 불린 수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을 참고한다. 김선출 진술서에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의 노래가 불렸다. 최병진 수사조서에는 정의가, 투사의 노래,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새 나라의 어린이, 그 때 그 사람 등이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로 불렸다. 이외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린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항쟁이 끝나고 김종률이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태춘의 '5.18(잊지 않기 위하여)'까지 또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다. 다시 파랑새를 생각한다. 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단지 전봉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였을까. 처형에 대한 애절한 반응이었을까. 적어도 이 노래를 참요의 범주에 넣고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라로 거슬러 오르는 관세음보살과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던 민요들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기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방 5.18의 노래를 어떻게 소비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는 것인지. 구시대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준비했던 그 노래, 참요 말이다. 다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 것인지 녹두장군 파랑새 노래에 비춰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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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애주의 춤 그리고 춤론에 담긴 생명철학Ⅰ. 들어가며 우리 춤의 뿌리를 붙들고 무궁 창성에 앞장섰던 전통춤 계승자, 추악하고 해로운 액운을 제치고 새로운 세상 문을 열어 이로운 기운을 불러들였던 시국춤 창안자, 그가 시대의 춤꾼 이애주1)이다. 옛 전통과 시대적 창안을 오가며 무한히도 개전되었던 그의 춤 세계는 세기에 부응하여 신명의 날개를 활짝 펴고 민족의 춤으로 거듭났다. 가락에 흥과 멋을 얹어 신명에 거듭난 춤으로 불태웠고, 그 자태는 궁극에 달하여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 춤새가 혼돈에 처한 시국에 올라앉으니 그 또한 민주화를 울부짖는 바람맞이춤으로 승화되었다. 전통춤 계승자로 그리고 민중의 희로애락을 풀어낸 시대의 바람맞이 춤꾼으로 우뚝 선 그가 우리 시대를 풍미한 이애주이다. 본 글은 학술적 이론을 내 세우거나 특정 논지를 쟁점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2022년 5월 세 번에 걸쳐 개최된 춤꾼 이애주 추모행사2)에 참여하며, 상기한 그의 전통춤 계승 가치, 그가 시대적으로 창안한 창작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춤의 생명철학을 사회적 시각과 사상적 관점에서 살핀 것이다. 이러한 작업 이면에는 오늘날 한계에 도달한 한국춤의 기능적, 형태적, 예술미학적 접근을 뛰어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이념과의 관계 속에서 작용되고 응용되는 우리 춤의 본질 및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적 예술 현상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움직임의 목표가 삶의 생명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이애주 전통춤의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을 예증 삼아 그의 춤 생애 그리고 그의 전통춤 세계관을 살펴 볼 것이다. 이애주 1주기 추모행사는 2022년 5월 10일 (화) 오전 11시 그가 묻힌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지에서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 1주기 추모 나눔굿>으로 개막되었다. 다음 날 5월 11일 (수) 오후 8시에는 그가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던 경기아트센터의 소극장에서 '우리 춤의 혼과 맥 그리고 기억'의 이름으로 추모공연이 있었고, 5월 27일 (목) 오후 2시부터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 한성준 바탕 한영숙 류 이애주 맥: 승무의 미학'(2022), '고구려 춤 연구'(2022), '춤꾼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2022)의 출판기념회 및 '이애주 춤: 학예굿'이 개최되었다. 추모행사에는 이애주와 함께 민족춤 문화 회복을 위해 사지 동거했던 동지 및 춤계 선후배, 동료 그리고 제자가 함께하였다. 춤 '땅끝', '나눔굿 밥', '도라지꽃' 등 세 개 작품에서 드러난 기획 의도, 춤판 현장, 이면에 담긴 이애주 춤의 생명관에 대해 논할 것이다. 세 개의 작품에는 겉 치장을 요하는 미학적 춤이 아닌 내면의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이른바 영혼이 살아 숨쉬는 춤, 공동체 정신을 살리는 춤, 민중의 아픔을 품어 내는 치유의 춤 사상과 사회적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통춤과 창작춤을 넘나들며 표명하고자 했던 이애주 춤의 본성과 의미를 탐색하고 그 속에 담긴 생명철학을 파악하고자 한다. Ⅱ. 시작하며 1. 이애주의 전통춤 및 계승 여기서는 전통춤 계승자 이애주가 전수한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 그리고 이애주 춤 맥을 잇고 있는 현재의 계승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중, 「승무」, 「살풀이춤」, 「태평춤」만을 다루는 까닭은 첫째, 한성준-한영숙-이애주가 전승한 여러 전통춤 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이면서 기본적인 춤이라는 점, 둘째, 경기제 대풍류 및 경기 무속음악을 춤 장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 셋째, 살풀이춤을 통해 보건대, 단아하고 우아한 독창적 춤 새로 추어진다는 점(이은주, 1998), 넷째, 전승 계보가 명확하다는 점 등의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중, 「태평춤」은 이애주 자신이 늘 주장한 바와 같이 태평무의 원 춤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공연에서도 원 춤에는 원 장단을 써야 한다며 경기도당굿 악사를 대동하여 「태평춤」 공연에 임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애주 전통춤은 춤계에 익히 알려진 충남 홍성출신 한성준(남, 1874-1941) 그리고 그의 손녀 한영숙(여, 1920-1990)으로 이어져 온 족보 있는 전승계보를 갖고 있다. 한성준은 일찍이 전통연희 무대화와 예술화에 주목하여 이를 성취적으로 이룩해 낸 한국 근대 연희사의 거목이다. 그의 민족춤 예술화에는 신앙, 놀이, 의례로써 사유된 민중사상과 시대적 철학이 담겨 있어서 민족주의적 사고와 미래를 향한 예술 창달의 미래관을 일깨웠다. 그동안 버림받고 묻혀 있던 옛 춤을 세상에 펼쳐 보이며 춤 예술 발전을 도모하였기에 그를 한편에서는 춤 문화운동가라고도 한다. 한성준의 춤 무대화 업적 뒷면에는 그의 천부적인 음악적 재질을 바탕삼아 이루어진 우리 것 지키기에 대한 투철한 의지가 서려 있다. 한편, 한성준의 「승무」 및 여타 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경기도 용인 출신의 명인 김인호(남, 1858-1932)와 연결된다(이병옥, 2022, pp. 1-21). 그 까닭은 명고수 한성준이 광무대(光武臺, 1898에서 1930년까지 서울에 존속했던 전통연희전문극장)에서 김인호 춤을 전문적으로 반주했고, 김인호가 권번에 나가 춤을 가르칠 때도 동참하여 장단을 잡아 주었다(이병옥, 2018). 명인으로 이름 석 자를 떨친 김인호는 전남 담양 출신 이날치(남, 1820-1892)의 제자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성준은 김인호에게서 많은 춤을 익혔고, 1930년대에 이르러 김인호가 사망한 후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여 김인호가 남긴 춤을 정립하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이병옥, 2022, 15). 이와는 또 달리, 한성준의 「승무」 등 전통춤은 또한 전북 정읍 세습무 출신의 전계문으로부터 전수되기도 하였다. 전북지역 단골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전계문(남, 1865-?)은 명고수였을 뿐만 아니라 거문고, 가야금, 해금, 해적, 대금 등의 기악과 성악 그리고 춤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김익두, 2022, 48; 김익두, 전종구, 최동현, 최상화, 1992, 245-247). 이처럼 한성준 춤은 윗대로 올라가면 그 전승 계보가 김인호 그리고 전계문과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시 이러한 명인들이 모두 남자였다는 것이고, 또한 음악에 능통한 고수였다는 것이며 그 출신 지역을 호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정통한 계보를 잇는 이애주는 1947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출생할 당시, 운니동에는 국립국악원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 이애주는 일찍이 국악원 활동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이애주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국악원 악사로 활동하다 춤을 가르치고 있던 김보남(남, 1912-1964)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한국동란 때 황해도 사리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부모는 일찍이 이애주의 춤 길을 열었고, 특히 어머니의 뒷바라지는 헌신적이었다. 어린 이애주가 김보남으로부터 배운 춤은 기본춤을 비롯한 「승무」, 검무, 소고춤, 무고, 민요 가락으로 추어졌던 아리랑, 밀양아리랑, 노들강변, 양산도, 천안삼거리 및 궁중정재 춘앵전 등이었다. 성장한 이애주는 196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하였고, 국립무용단 객원으로 공연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학 4학년이던 1968년 문화공보부가 주최한 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주의를 놀라게 하였다. 필자: 양종승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전공하고 문화인류학을 부전공하여 Folklore and Cultural Politics in Korea: Intangible Cultural Properties and Living National Treasures (민속과 문화정책: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인간문화재) 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민속기록학회 회장,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연구 관심사는 샤머니즘, 무형유산, 전통춤 등이며, 주요 연구로 "한국의 굿" (공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God Pictures in Korean Contexts (한국 샤머니즘 神圖) (공저), '우리춤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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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이애주 교수 추모기념 학술대회고(故) 이애주 선생 1주기를 추념하는 출판기념회와 우리춤에 대한 고인의 고민과 예술철학을 헤아려보는 ‘학예굿’이 오는 27일 과천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열린다.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인 이애주 선생은 시대의 춤꾼이면서 우리 춤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를 한 깊이 있는 연구자다. 2019년 9월부터는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맡았다. 내일 27일 오후 2시부터 이애주문화재단에서 이애주 저서 3책 출판기념회를 하고, 이어서 3시부터 이애주춤을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한다. 학예굿의 첫째 마당은 학술발표로 ▲임재해(안동대 민속학과 명예교수)의 ‘이애주춤의 현장성과 변혁적 운동성’ ▲문무병(제주신화연구소 소장)의 ‘이애주의 춤과 제주 4·3 차사영맞이’ ▲김익두(전북대 국문과 명예교수)의 ‘이애주춤과 남학’ ▲채희완(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명예교수)의 ‘초기 이애주춤의 활동상과 예술선언’ ▲조경만(목포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의 ‘이애주춤과 세상’ ▲김연정(제자, 한예종 겸임교수)의‘이애주 선생의 춤 활동과 예술정신의 배경’ 등이 주제 논문을 발표한다. 발표 후 정병훈 국립경상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자유토론을 이어간다. 둘째 마당은 예술행사로 한국전통춤회와 한국민족춤협회가 선생의 ‘영가무도’, ‘바람맞이’를 각각 재현한다. 또한 풍물굿패 삶터의 한판 풍물굿, 창작판소리연구원의 소리 공연도 예정돼 있다. 마지막은 집들이 마당으로 이애주 선생의 유품과 자료를 함께 둘러보고, 음식을 나눠 먹는 ‘나눔과 돌아봄’으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임진택 이애주문화재단 상임이사는 "‘학예굿 이애주 춤’은 지난 2012년 이애주 선생의 서울대학교 퇴임기념 학예굿 ‘한국춤의 생성론과 이애주의 춤세계’에 이어 두 번째 치러지는 행사”라며, "앞으로 몇 번의 학예굿을 거쳐 주제발표 논문들을 모아 선생에 대한 평론집을 내고자 한다”고 밝혔다. 첫번째 발표는 임재해 교수의 ‘이애주춤의 현장성과 변혁적 운동성’이다. "이애주춤은 무대춤으로서 구경꾼에게 보여주는 공연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춤이 필요한 현장을 찾아가 춤추는 현장춤이 특성이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정치적 변혁과, 미시적으로는 서양춤에 경도된 무용계의 모순을 우리춤 운동으로 극복하는 변혁적 운동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애주의 현장춤은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해방춤이자 구경꾼과 함께 춤추는 '대동춤'이라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힌다".(임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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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7)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증산 강일순은 왜 천지굿이라 이름하고 손수 장구를 메고 춤을 췄던 것일까? 그 이유를 내가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증산교가 표방했던 선천과 후천의 개벽사상 혹은 주문 태을주(太乙呪)와 관련해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을주는 모든 질병을 내쫒고 선계(仙界)의 개벽을 '태을천상원군'에게 기원하는 주문이다. 이 글씨를 써놓으면 부적이 된다 했다. 충청도 비인에 살았던 도인 김경흔이 50여 년간 공부한 후에 이 주문을 얻어 증산에게 주었고 이를 다시 차경석이 보천교(普天敎)로 가져간 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호명하는 우도농악 즉 마을농악에서 연예농악으로 변화된 형태의 농악이 발흥한 곳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읍이라는 점이다. 단체로는 전라도걸궁패, 정읍농악단, 협률사 등이 있다. 양옥경의 글 '근현대시기 호남 우도지역 연예농악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의미'(한국음악사학보 61집)를 인용한다. 보천교는 농악을 의례음악 곧 예악(禮樂)으로 삼고 전국의 농악인들을 총 결집하여 큰 농악판을 벌였다. 1930년대 보천교 교당 뜰에 전국의 쇠잽이, 장고잽이들이 자주 모여들었다. 모두 모집, 선발된 자들이었다. 우도농악의 명인 김오채의 구술에 의하면, 정읍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교당을 짓고 낙성식할 때도 그랬고, 일명 차천자(차경석을 天子로 불렀음) 집에서 농악판을 많이 벌였던 것 같다. 이때 차천자가 앉아서 구경하곤 했다는 것. 전북대 김익두교수가 차용남의 어린 시절 목격담을 구술 받아 증언한 바에 의하면, 차경석 교주가 십일전 좌상에 좌정한 가운데, 화려한 복색으로 차려 입은 여러 무리의 농악대가 현란한 진법과 율동 및 연주를 선보이면서 서로 경합을 벌였다는 것 아닌가. 지금으로 말하면 농악의 진법(陣法), 악기 겨루기 등이다. 천운을 돌리기 위해 했다는 열두 발 상모놀음, 도둑잽이굿 등도 같은 맥락이다. 보천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쇠들은 지금 우도농악의 초창기 명인들로 손꼽힌다. 우도농악이 그만큼 보천교의 천지굿에 영향 받은바 크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농악의 본래 기능은 마당밟이 곧 정초의 지신(地神)을 밟고 지기(地氣)를 울리는 일이다. 축귀(逐鬼)하니 증산의 입장에서는 태을주를 연주하는 일과 같았을까? 아니면 오방색, 삼색 띠, 열두 발 상모, 십이 채 등의 용어에서 보듯이 증산도에서 보천교에 이르는 '정역'의 이치를 연출했던 것일까? 이들 교리나 철학이 어떻게 농악의 진법이나 장단 구성에 활용되었는지 추적하는 일이 난망하지만 누군가는 추적해야 할 일이다. 증산 강일순이 천지굿을 열며 스스로 장구를 메고 노래를 부른 것이나 그 맥을 이어받았다는 차경석의 보천교가 농악을 의례음악으로 삼은 맥락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신앙촌의 박태선이 구원파의 유병언, 영세교의 최태민으로 분파되고, 호생기도원의 김종규를 거쳐 장막성전의 유재열이 신천지의 이만희로 연결되는 맥락은 물론, 이들이 행하는 의례음악 편성의 정통 혹은 이단을 분석하는 데도 유용하리라 본다. 이래 저래 그동안 전통이라 여겨오던 것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시작되려나. 인적 뜸한 거리, 어쩌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들을 대면하는 대한민국의 처지가 옹색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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